Ⅰ. 서
식사 시간이었다. 한 담임 선생님이 말했다.
“우리 반 아이들이 철학 선생님-아이들은 나를 철학 선생이라 부른다.-한테 뭔가를 배웠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최대 고민거리다. 교직에 들어선 이후 계속해서 들었던 말이고 듣기 꺼려했던 말이다. 안 그래도 철학자들의 주장을 설명한 후 아이들에게 물었다.
“이거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아, 예. 그런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아는데 모르겠다?”
“예.”
“그럼 아는 것은 무엇이고 모르는 것은 무엇이냐?”
“음, 말은 알겠는데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어요.”
“설명 중에 어려운 단어가 있었니? 모르는 단어라든가?”
“아니요. 그런데 선생님 말은 평범한데 어려워요.”
“평범한 말이 왜 어려울까?”
“또 그렇게 질문하지 마세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여간 어려워요.”
“왜 또라고 하지?”
“항상 그런 식이예요.”
“그런 식이 뭔데?”
“당연한 걸 질문하고, 생각을 뒤섞어 놓고, 단순한 걸 복잡하게 하고...”
어떤 아이는 나와 대화하면 항상 대장금이 되고 싶다고 했다.
“제 생각에는.. 그냥 그런 맛이 나기에 난다고 하였는데... 어찌 그러냐 하시면 그냥...”
이러한 말들은 고르기아스의 다음과 같은 명제를 떠올리게 한다.
“진리란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알 수 없다. 안다고 하더라도 전할 수 없다.” 양태범(2007). 고르기아스의 세 명제와 에피데익티케 논증(한국철학회 간행 哲學 제91집)의 번역을 다시 의역함. 원문 : 고르기아스는 『있지 않는 것에 관하여』에서 자신의 세 명제를 증명한다. “어떠한 것도 있지 않다. 있다고 하더라도 인식되어질 수 없다. 있고 인식되어진다 하더라도 다른 이들에게 명료하게 되어질 수 없다.”
내 삶과 철학자들의 삶이 아득하게 멀었듯이 내 설명과 아이들의 이해 또한 아득하게 멀다. 내 머리카락이 철학자들의 사고를 따라잡지 못해 빠졌듯이 아이들도 내 언어를 따라 오지 못해 존다. 내 아이들은 한 두 번의 ‘아하!’를 외치기 위해 긴긴 시간을 지루함과 싸우며 졸고 있다. 수업은 환희보다는 쓰라림을 더 자주 경험하게 한다.
Ⅱ. 본
대체로 수업은 『도덕』에서는 성공하고 『윤리』에서는 실패하였다. 1학년 『도덕』은 아이들과 내가 같은 현상을 보고 대화한다. 아이들은 이런 현상을 그렇게도 볼 수 있구나하고 생각하는 듯하다. 또는 나는 이렇게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저렇게 보시는구나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수업에 대한 평가도 좋고 덩달아 교원평가를 할 때에도 많은 댓글들을 적어 놓았었다.
하지만 2학년 『윤리』로 넘어와서는 다르다. 이퇴계와 기고봉이 사화(士禍)로 뒤숭숭한 사회 분위기속에서 주자의 글을 읽었고, 고민한 편지를 남겼다. 그 편지를 후대의 학자가 해석하여 다시 글로 남겼고, 그 글을 다시 어제의 내가 읽는다. 그 기록을 나름대로 이해하여 말로 설명하고, 그 말을 현재의 아이가 듣는다. 당연히 아이는 이퇴계와 기고봉의 TEXT를 이해할 수 없다. 아이는 내가 아니고 나 또한 이퇴계가 아니다. 교사의 언어는 중언부언하고 아이의 눈은 감겨 간다. 실패다.
아이들은 3학년 선배들한테 전해들은 ‘정말 머리에 쏙쏙 잘 넣어주시는’ 3학년 담당 『전통 윤리』 선생에게서 배우고 싶어 한다. 하루는 후배인 3학년 담당 『전통 윤리』 선생에게 말했다.
“네가 부럽고, 또 배우고 싶다.”
“형님 보면 제가 자괴감이 듭니다. 전 단지 요약 잘하고 기억 잘되게 만들어 줄 뿐이에요.”
“그것이 가장 중요하지 아니하냐?”
“하지만 윤리 공부가 단지 그 뿐인가요?”
“아이 머릿속에 들어가지 않는 지식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
“넣어준 지식이 작동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렇기는 하다만...”
우리는 모두 실패하고 있었다.
다른 교과에 비해 윤리·도덕 교과는 익히고 가르치기 어려운 교과다. 지식 체계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나 세우기가 어렵다. 아무나 가르칠 수 있고, 실제로 가르치려 한다. 아이들의 눈으로 보면 자기들을 가르치려는 많은 꼰대들과 윤리·도덕 교사들은 어느 정도나 차이가 날까? 수업 시간에 아이들은 곧잘 자신들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내 인생은 나의 것. 그냥 나에게 맡겨 주세요! 하지만 전적으로 아이에게 맡길 수만 없는 게 선생의 임무다.
윤리라는 영역에서는 기본적으로 아이와 선생은 대립 관계다. 선생은 훈계하고 아이는 반항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때 다른 교과도 그러하겠지만, 윤리·도덕 교과 선생은 다음과 같은 아이의 반문에 특히 더 취약하다.
“선생님은 그렇게 살아요?”
뭐라고 대답해주어야 할까? 그래서 교사는 위선자 아니면 또라이가 된다.
“그렇게 산다.” 하면 위선자다. 이 대답에 대해 아이들은 의심한다. 선생도 자기가 가르친 대로 다 살아갈 수는 없다. 특히 윤리·도덕 교과는 더욱 그렇다.
“아니” 하면 또라이다. 이 대답에 대해 아이들은 비웃는다. 선생은 자기도 못하는 것을 하라고 하는 것이다. 스스로가 기본이 안 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대답이 된다.
윤리 수업은 칼날 위의 춤사위 같다. 선생이 서 있는 자리는 위태위태하다. 선생은 어느 쪽으로도 쓰러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제대로 선생 노릇한다는 것은 두 대답 사이에 있다. 윤리에서는 이를 중용(中庸)이라는 것으로 개념화한다. 선생은 이를 체화하고 있어야 한다.
수업은 항상 패키지다. 수업에서 아이들은 선생을 떠난 어떤 과목을 배우지 않는다. 아이는 나를 떠난 별개의 윤리를 좀처럼 배우지 못한다. 아이들에게 윤리란 내 인격과 엉겨 붙은 무엇이다. 그래서 반항하지 않는 아이는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 TEXT는 배워도 좀처럼 자기 속에 CONTEXT로 변화시키지 못한다. 윤리는 “아니다.”로 시작해야한다. 아이들 마음 속에 일어나고 있는 CONTEXT를 살피지 않으면 배움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윤리 수업에서는 CONTEXT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 어떤 TEXT이든 간에 그 의미가 TEXT 자체에 의해 사전에 결정되고,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란 관점에서 윤리라는 교과와 CONTEXT 라는 용어는 서로 잘 어울린다.
교사와 부모의 개입을 주제로 수업을 한 적이 있다. 질문은 필자가 한 것이고, 대답은 개인이 아니라 여러 학생들이 한 것이다. 편의상 답변자를 밝히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보자. 너희들 선생님이 뭐라고 하면 「내 인생 니가 와?」 하는 마음이 들지?”
“예.”
“그런데 만약에 엄마나 아빠, 선생님이 「니 인생 내가 와?」 라고 말하면? ”
“서운해요.”
“왜 그럴까?”
“두 가지를 다 원해서 그런 것 같아요.”
“마음은 두 가지라도 행동은 하나야. 한 순간에 한 행동만 할 수 있어. 그럼 부모나 선생은 너희의 어떤 마음에 맞추어야 할까?”
“그때그때 다르게...”
“그러면 기준이 없다고 말하지 않을까?”
“그러면 우리가 잘못 된 것일까요?”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잖아?”
“마음을 바꿔 먹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왜 바꿔야 하지?”
“잘못된 것이니까요.” 아이들은 쉽게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너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왜 잘못된 것이지?”
“안 되는 것을 원하는 것이니까.”
“생각도 못하냐?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 자체가 죄인가? 생각까지 규제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행동만을 비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산다는 것이 슬프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 슬퍼?”
“원하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고, 안 이루어지니까 행복하지 않고...”
“행복은 불가능할까? 행복한 사람은 어떻게 행복해졌을까?”
“행복은 환상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사랑처럼...”
“비난 비난하는 사람은 행복해질 수 없는 사람이다. 비난하는 사람에게 행복이란 나 아닌 누군가가 나에게 주는 어떤 것이다. 비난하는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야 하는 사람이다. 비난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당신이 나에게 이러이러하게 해주어야 하는데, 당신이 그러지 않아 나는 불행하다. 그러므로 당신은 비난 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전형적인 노예 논리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하는 사람이 행복하다. 행복의 열쇠가 자신에게 주어져 있다고 믿을 때, 우리는 타인에 대해 관용적이게 된다.
하거나 냉소 냉소주의자는 세상의 꼭대기에 있는 사람이다. 똑똑한 사람이 냉소적 cynical 이기 쉽다. 냉소는 우월하지 않으면 도달 할 수 없는 상태이다. 하지만 냉소는 어떤 문제든지 해결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냉소주의자는 세상을 알 수 있어도 세상을 구할 수는 없다. 앎은 최고 수준에서의 뛰어 넘음을 필요로 한다.
하지 않고도 똑똑해질 수는 없는 걸까?”
“마음은 둘이고 행동은 하나니까 두 마음 중 하나는 만족할 수 없잖아요.”
“어렵더라도 시도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너희들이 양립 불가능하다고 하는 두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볼까? 지금 대립하는 게 「내버려두어라」 와 「버려두지 말아라」 잖아.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해도, 요구를 분명하게는 할 수가 있을 것 같은데!”
“요구가 어떻게 분명해지나요?”
“결국 너희가 원하는 게 「어른들이 인내심을 갖고 우리들을 좀 지켜봐 달라」는 말이잖아.”
“어, 그러네요. 그렇게 보니 분명하네요.”
“그 요구가 어렵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잖아. 어른 같은 어른들이 있다면 말이야.”
“그런데 아까는 왜 대립한다고 생각했을까요?”
“너희도 너희 마음을 분명하게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윤리 지식의 최종 목표는 아이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 이루어짐은 원래 그대로의 윤리 지식이 재현되는 것은 아니다. 다르지만 같기도 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이러한 같음과 다름의 관계를 이율곡의 이통기국(理通氣局)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이는 서경덕(徐敬德)의 기일원론에 대해 담일청허지기(湛一淸虛之氣)에 관한 견해를 비판하면서 이통기국론을 내세웠다. 서경덕은 사람을 포함한 우주 만물이 모두 기에 의해 생겨났으며, 그 기의 본연(本然)인 담일청허지기는 모든 사물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이는 모든 사물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형체가 없는 이인데, 이러한 측면을 가리켜 이통(理通)이라고 했으며, 구체적 형체를 갖추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기는 그 형체에 따라 차별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측면을 가리켜 기국(氣局)이라고 했다. 그는 이러한 차이를 그릇에 담은 물에 비유했는데, 그릇의 모양이 서로 다른 것은 기국이며 그 그릇 속에 담긴 물이 모두 같은 것은 이통이라 했다. -브리태니커
윤리 지식은 그 사람의 삶에서 다시 피어나야 한다. 윤리 지식은 전달되지만 재현되지는 않는다.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도 없고, 적용할 수도 없다. 모든 경우와 상황에 합당한 하나의 규정이나 원칙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임병덕(2007), 차미란(2004), 황규호(1998)의 논문을 참고하시기 바람.
규정이나 원칙을 누가 발화(發話) 하느냐도 중요하다.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말씀은 간단하다.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그런데도 이 말이 주는 무게감은 크고,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 또한 심대하다. 실제로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이를 삶의 진정성이라 한다.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가 TEXT라면 김수환 추기경의 삶은 CONTEXT이다. 그리고 그 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행동 변화도 CONTEXT이다. 같은 ‘거위의 꿈’도 이적이 부를 때와 인순이가 부를 때가 다른 법이다. 그래서 수업에서 교사의 인격은 중요한 수업 도구가 된다.
언어학에서 TEXT는 CONTEXT 상에서만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윤리학도 그러하다. 윤리 수업은 더 나아가야 한다. 수업에서의 윤리-TEXT는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잉태되어, 위대한 영혼 속에서 성장하고, 그의 입을 통해 세상에 태어나, 기록됨으로써 미이라가 되었다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다시 살아나야 하는 어떤 것이다.
윤리를 이해할 수 없으면 삶을 이해하기 어렵다. 자신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라도 아이는 자기 마음속에 나름의 윤리적 기준과 가치를 세워야 한다. 현재의 윤리 규범은 과거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규범에 대한 학생들의 무관심한 태도는 사회와 삶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규범을 모르는 학생들은 지금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없고 쉽게 분노하고 좌절한다.
대부분의 사상사 수업에서 학생들은 단지 시험에 나오기 때문에 옛 사상을 공부 한다. 수능에서 윤리를 선택하지 않는 아이는 수업 시간에 잠을 자거나 다른 과목을 공부한다. 윤리 사상은 자신들의 삶과는 관계없는 과거의 사건일 뿐이다. 이는 윤리를 단지 TEXT로서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윤리적 맥락 CONTEXT에 대한 이해이다. 아이는 윤리 기준이 출현했던 당대의 맥락을 이해하고 나서야 윤리-TEXT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고, 이를 자신의 삶속에서 구현-CONTEXT 할 수 있다.
윤리 교과서에는 영국 경험론과 사회계약설, 경제학이 어떻게 연결되어있는 지 설명하고 있지 않다. 강유원의 책『책과 세계 : 텍스트와 컨텍스트가 드러내는 세상』에는 이들의 관계를 잘 요약하여 보고주고 있는 데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비서 출신인 토마스 홉스는 이미 1651년에 출간된 "리바이어던"에서 종교에 대한 비판을 마무리지었고, 그 후 대영제국은 세속 국가로의 길을 착실히 걸어, 아담 스미스에 이르면 타산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는 인간들이 자기도 모르게 쌓아올리는 국가의 부를 논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좀 더디기는 했으나 프랑스에서는 1772년 "백과전서"가 발간되면서 신학을 미신과 같은 차원에 놓아두었고, 종교적 정당화인 왕권신수설에 근거하여 유지되던 구체제가 혁명에 의해 종지부를 찍었다. ... 대영제국에서는 현실법칙을 철저하게 밀고 나가, 드디어 인간과 그 인간들이 이루어내는 사회에 대한 완벽한 재정의에 이른다. 1859년에 출간된 "종의 기원"이 바로 그것이다. ... 이로써 무한 경쟁에 근거를 둔 근대의 자본주의세계는 확실한 이론적 근거를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이념으로 등장한 사회주의에서도 '투쟁'이라고 하는 방법론을 받아들였다. 인간은 더 이상 도덕의 겉옷을 걸칠 필요가 없게 되었고, 그가 자본주의자건 사회주의자건 맨몸으로 살갗을 찢어가며 쓰라린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강유원(2006). 책과 세계 : 텍스트와 컨텍스트가 드러내는 세상. 살림. pp.87-91
윤리는 추상화의 단계를 거쳐야 하지만 구체적인 상황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이를 이통기국(理通氣局論)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를 위해 수업에서 하나의 윤리 사상 TEXT에 대해 최소 3개의 CONTEXT를 고려하려고 한다. 철학자의 TEXT를 당대의 맥락-발화(發話)된 CONTEXT, 윤리 교사의 맥락-체화(體化)된 CONTEXT, 학생의 맥락-도달된 CONTEXT 속에서 재해석하려고 한다.
이를 형식화하여 실제 수업에 적용한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당대의 맥락 : 수업의 내용 → (관련 깊은 질문) 무엇을 가르치려는가?
CONTEXT 교사의 맥락 : 수업의 도구 → (관련 깊은 질문) 어떻게 가르치려는가?
학생의 맥락 : 수업의 목표 → (관련 깊은 질문) 왜 가르치려는가?
예를 들어 사단칠정논쟁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인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서 일어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논쟁이다.
[가르치려는 내용]
이황은 사단(四端)이란 사물의 이(理)에 해당하는 마음의 본연지성(本然之性)에서 발현되는 것이고, 칠정(七情)이란 사물의 기(氣)에 해당하는 마음의 기질지성(氣質之性)에서 발현되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기대승은 이에 대해 반박하며 8년간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황은 8년간의 긴 논쟁 끝에 자신의 주장을 수정했다. 사단은 이가 움직이면 기가 따라서 생기는 것이며, 칠정은 기가 움직이면 이가 따라서 드러나는 것이다. 즉 사단이란 이가 움직여서 기가 따라오는 것이고, 칠정이란 기가 움직여서 이가 그것을 조절하는 것이다. 비록 이렇게 주장을 수정하였지만, 여전히 이황은 사단은 선으로 귀결되고 칠정은 선, 악으로 모두 귀결이 가능하기에 그것의 출발점을 살펴보면 서로가 다르다는 입장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사단이라는 도덕적 원리가 인간의 욕망과 관련된 칠정에 의해 오염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해, 도덕적 원리의 절대성을 확립하여 주체적 인간의 확립과 사회질서를 수립하고자 했다. 한편 기대승은 성리학의 도덕적 측면보다는 관념적인 측면에서 용어의 불분명한 사용과 모호한 표현으로 인한 성리학 체계의 모순점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후에 기대승의 관점은 이이의 학풍으로 계승된다. 위키 백과(2011. 7. 13)
[교사의 이해]
조선 성리학의 사단 칠정 논쟁은 사화에 희생된 당대 사림 사회의 분위기를 이해하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퇴계의 주리(主理)론은 거칠게 약술하면 “사림들이여 꿈을 잃지 마라. 꿈은 이루어진다. 세상은 이념이 만들어가는 것이다.”이다. 이에 반해 고봉의 반론은 “선배님은 세상을 너무 모르셔요. 현실은 만만하지 않아요.”라고 할 수 있다.
[학생의 맥락]
학생들에게는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 번째, 네 번의 사화(士禍) 후에 젊은 사림들은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질 것 같은가? 두 번째, 네가 만일 이들에게 충고를 하고 싶다면 어떤 충고를 하고 싶은가? 세 번째, 충고를 하면 사림들은 어떤 항변을 할 것 같은가?
Ⅲ. 결
학생들에게는 CONTEXT가 훨씬 중요하다. CONTEXT가 주어지지 않으면 TEXT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 선생은 당대의 CONTEXT와 연구자- 대부분 교수님들-의 CONTEXT를 아직 자신의 CONTEXT 속에서 완전히 구현하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이 힘겨운 일이 끝나도 아직 아이들의 CONTEXT 속에서 어떻게 작동할지 예측하기 어렵다.
필자 또한 아직 아이들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 아이들 하나 하나가 CONTEXT를 가지고 있어 참 어렵다. 한 사람을 얻으면 한 세상을 얻고, 한 사람을 잃으면 한 세상을 잃는다. 적지 않은 교직 생활을 했음에도 아직 아이들의 세상 밖에 서 있다. 아직도 얻지 못한 많은 세상들의 우주에서 CONTEXT라는 개념이 세상들에게로 나아가는 길을 비추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졸업한 아이가 찾아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지는 길에 내 기대가 부담이 되었던지 아이가 말했다.
“선생님은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계시는 것 같아요!”
“그건 네가 나에게 뭔가를 보여주려고 하니까.”
“제가 뭘 보여주려고 하는데요?”
“누구나 보여주고 싶은 나가 있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보이는 그대로의 나로 판단하지. 그 사이에 「보이는 나」와 「보여 주려는 나」의 간격이 있어. 실제와 이미지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지. 하여간 사람들은 그 차이 때문에 고민을 해.”
“제가 잘 보이고 싶어 한 것은 있어요. 인정해요. 하지만 그건 제가 아니에요. 단지 제 바람일 뿐이잖아요. 실제의 저는 초라한 걸요.”
“만일 네가 나이 든 사람이라면 난 너를 보이는 그대로 판단해야 하겠지. 늙은이들이 「보여주려 하는 나는 착각이라고 부르지. 늙은이들은 철저하게 「보이는 나」로만 판단해야만 해. 비록 그가 자신은 변할 수 있다고 말해도 시간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야. 하지만 넌 아직 젊어. 너에게도 「보이는 너」와 「보여주려는 너」 사이에는 넓은 간격이 있어. 하지만 그 사이를 우리는 희망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은 가능성이라고도 부르기도 해. 그래서 젊은이들을 판단할 때는 그가 보여주려는 이미지까지 고려해 주어야 하는 거야. 그게 젊은이의 참모습에 가깝거든......”
하나의 문장으로도 삶은 깊어질 수 있다.
참고 문헌
● 강유원(2006). 책과 세계 : 텍스트와 컨텍스트가 드러내는 세상. 살림
● 양태범(2007). 고르기아스의 세 명제와 에피데익티케 논증 Gorgias" 3 Thesen und epideiktische Argumente. 한국철학회 간행 哲學 제91집(2007.5)
● 임병덕(2007). 교육목적으로서의 자기 지식. 한국도덕교육학회 간행 도덕교육연구 제18권 2호(2007.2)
● 차미란(2004). 도덕교육의 목적으로서의 지행합일. 한국도덕교육학회 간행 도덕교육연구 제15권 2호(2004.2)
● 황규호(1998). 지식교육이 추구하는 앎의 상태에 대한 분석. 교육과정연구 The Journal df Curriculum Studies 제16권 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