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사진은 1977년 퓰리쳐상 수상작이다.
수상자는 사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976년 10월 6일 태국의 수도 방콕의 탐마삿 대학에 결집한 좌파 학생과 주변에 모인 우파 세력이 충돌했다. 총격전이 시작되고 국경 경비대가 동원되자 우세를 보이게 된 우파측은 극단적인 폭력을 사용하였는데, 학생을 때려 죽여 나무에 매달거나 길 위에서 태워 죽이는 참혹한 광경을 연출하기까지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수 십 명이 사망하였고 수 천 명이 구속되었으며 결국 급진적인 학생운동 세력은 일망타진되고 말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가 국정의 실권을 쥐자, 1973년 학생궐기 이후 계속되었던 태국의 민주화 시대는 종지부를 찍었다.'
1976년 10월 민주항쟁을 탄압하던 경찰은 탐마삿 대학에 난입하여 2명의 학생을 나무에 목매달았다.그 뒤 학생들은 이 끔찍한 만행을 허수아비로 재현하여 전시하였다. 그런데 우익 신문 중 하나가 이 허수아비 사진을 찍은 뒤 허수아비의 얼굴을 왕세자의 얼굴로 변조하여 신문에 올렸다. 사진을 보고 격분한 우익 폭도들이 탐마삿대학에 난입해 몇백 명을 학살한 뒤 여학생 한 명을 나무에 목 매달아 죽이고 성에 차지 않아 위의 사진과 같은 만행을 저질렀다. 이들이 이렇게 잔인하게 나오는 까닭은 이 사건이 왕실 모독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허수아비에 왕세자의 얼굴 사진이 붙어 있다고 생각했다 하더라도 이들의 행동은 이해가 되지 않는 면이 있다.
이 사건을 유발한 단체는 태국의 극우 단체이다. 이 극우 단체는 태국 국왕인 푸미폰 아둔야뎃을 지지하고 있다. 여학생의 시체를 내려치는 행위를 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이채롭다. 특히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아이의 얼굴이 군중의 광기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지금 이들은 즐거운 것이다.
태국인들의 국왕과 왕실에 대한 존경심이 광기를 만든 것일까?
그렇게 해석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것이 있다.
태국왕실모독 처벌법이 그것이다.
국왕과 왕실을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왜 이 법이 있는 것일까?
태국에서 이 법에 저촉되는 자는 외국인 내국인을 가리지 않고 엄중 처벌된다.
사진에 조그만 위해만 가해도 형사고발된다. 국왕과 왕실에 대한 비판은 최소 10년형이다.
사람들은 왕실과 국왕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주위부터 둘러본다.
이 사람들이 보이는 광기의 배경은 두려움과 공포이다. 두려움과 공포와 맞서 싸울 수 없는 사람들은 살기 위해 공포와 두려움과 하나가 된다.
이들의 심리를 알기 위해서 태국 왕실과 군부, 그리고 태국 국민들이 얽힌 쿠테타의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태국의 근대사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 1932년 12월 인민당에 의한 무혈쿠데타로 전제군주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 성립.
▲ 1939년 국호를 샴(싸얌)에서 타일랜드(타이)로 바꿈.
▲ 1942년 태국의 주권과 독립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일본과 공수동맹을 체결, 대영․미 선전포고.
▲ 1945년 8월 16일 대영․미 선전포고는 일본의 무력강압에 의한 임을 선언하고 친일파 제거.영국과
프랑스 양국에 자진해서 손해배상을 하고 미국의 지원에 의해 패전국 대우를 면함.
▲ 1946년 현 국왕 푸미폰 아둔야뎃 왕자가 짝끄리 왕조의 9대왕으로 즉위.
▲ 1973년 10월 학생시위로 타넘 군사정권이 무너진 후 군소정당 난립.
▲ 1975년 1월 총선거 실시로 쎄니 내각이 성립되었으나 2주만에 와해되고 큭크릿 연립내각 등장.
▲ 1976년 2월 총선거 실시로 쎄니 내각이 재등장. 10월 쌍앗 장군의 쿠테타로 타닌 내각 성립.
▲ 1977년 10월 군사쿠테타로 끄리앙싹 장군 집권.
▲ 1979년 4월 총선거로 끄리앙싹이 민간인 총리로 취임.
▲ 1980년 2월 끄리앙싹이 경제정책 실패로 총리직을 사임, 당시 국방장관이던 쁘렘 띤쑬라논 장군
이 정권을 이양 받음.
▲ 1981년 및 1984년 군사쿠테타 실패.
▲ 1986년 8월 연립여당내의 알력으로 총선 실시하여 5차 쁘렘 내각 출범.
▲ 1988년 8월 총선 후 민주화 바람으로 쁘렘이 퇴진하고 찻차이 추한이 민선총리로 취임.
▲ 1992년 수친다 육군사령관이 총리에 취임하자 수친다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 전국적으로 발생,
비상사태 선포.9월 수친다를 퇴진시키고 총선에서 하원을 선출한 후 추언 릭파이가
총리에 취임
▲ 1995년 5월 연립정권의 제3당이던 팔랑탐(불법의 힘)당 연정탈퇴, 하원해산.
▲ 1995년 7월 2일 총선거 실시로 태국국민당이 제1당으로 약진.
반한 씰라빠아차를 총리로 한 7당 연립정부 출범.
▲ 1996년 11월 17일 총선거 결과 제1당으로 차왈릿 용짜이윳 부총리 겸 국방장관이 이끄는
신희망당이 6개정당을 통해 연립정부 구성.
-http://www.missionthailand.net/thai2.htm에서 발췌-
태국왕실모독처벌법은 태국 최초의 군부독재 정권인 피분 시대에 만들어졌다. 1932년 인민당의 쿠테타 전제 군주제가 붕괴된다. 1947년 군부독재 시대를 본격적으로 연 피분은 정통성 결여를 만회하기 위해 외국으로 도망간 태국 왕실을 데려왔다. 현 푸미폰 국왕은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나 주로 유럽에서 살다 방콕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푸미폰 국왕은 피분 군부와 손 잡았다. 그 후 60 여 년이 지나 총 20명의 총리와 16개의 헌법, 18번의 쿠데타 동안에도 살아남아 군부를 뛰어넘어 직접 쿠데타를 사주하는 위치까지 올랐다. 국왕의 권위가 최고조에 이른 것이 수친다 장군과 잠롱 시장을 무릎 꿇힌 사건이다.
1991년에 수친다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1992년 3월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수친다가 이끄는 국가 평화유지협의회가 밀어주는 싸막키탐당이 집권당이 되었고 나롱웡완이 총리에 올랐다. 그러나 총리는 곧 수친다로 바뀐다. 이에 항의하여 진리의 힘 당의 잠롱과 신희망 당의 차왈릿 등이 주축이 된 시위가 벌어졌다. 1992년 4월부터 태국 왕궁 앞 싸남루앙 광장에는 수만의 시민이 모여 수친다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전 방콕시장이었던 잠롱은 국회 의사당 앞에서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
연일 수만의 학생과 시민은 수친다의 사임과 국회 해산을 요구하며 잠롱에 대한지지 시위를 벌였다.
5월이 되면서 시위대는 20만에 가깝게 늘어났다.
5월 11일 4개 야당 당수와 학생 지도자 등은 정부측과 헌법 개정 합의와 푸미폰 국왕의 중재에 따라 일단 1주간 휴전에 들어갔다.
5월 17일 정부의 조치가 없자 2차시위가 발발했다.
5월 18일 수친다는 시위현장에 군 병력을 투입했다.
군인들은 방콕의 민주 기념탑 부근에서 시위중이던 시위대에게 바로하여 50여명에 가까운 학생과 시민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부상당했다.
군부의 온건파는 수친다를 제거하기위해 방콕으로 병력을 이동시키며, 친 수친다계 군부에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방콕으로 통하는 도로를 막았다.
푸미폰 국왕은 수친다를 불러 태국 국민의 위대한 타협 정신에 따라 총리직을 사임하고 태국을 떠나라는 권유를 했다. 이 때에 국왕은 군부의 수친다 총리와 야권의 잠롱 시장을 불러들여 무릎을 꿇어 앉히고 질책하는 모습을 보여 국민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5월 23일 수친다는 스웨덴으로 망명길에 오리고 태국판 5.18 민주항쟁은 끝을 맺었다, 과도정부의 총리는 아난 전총리가 맡았다.
그해 9월 총선이 실시되고 민주당, 신희망당, 진리의 힘당 등으로 연정이 구성되었다.
그 후 태국에서 국왕은 신이 되었다. 태국인의 마음 속에는 존경과 공포의 양면성이 생겼다.
"왕과 왕비, 왕실의 후계자 또는 왕실을 비방 모독하거나 위협하는 자는 3년에서 15년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 태국 형법 112조 이다. 60년을 이 법 아래 산 사람들은 법을 내면화했다. 내면화 된 법은 공포를 낳았고 공포는 존경심을 낳았다. 그리고 그 존경심이 폭도를 낳았다.
이것에는 좌 우익의 차이가 없다.
공포와 두려움에 저항 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공포와 두려움 그 자체가 되려고 한다.
참고 사이트
태국의 역사 http://www.missionthailand.net/thai2.htm
승주나무의 면모 http://jagong.sisain.co.kr/321
한겨레 21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 아시아의 몬도가네, 타이 왕실모독처벌법
http://h21.hani.co.kr/section-021019000/2008/07/02101900020080724072003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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